이정구 부산대학교 중국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경제 전공자
466호 기사입력 2023-06-28 19:13
주제: 국제, 중국, 역사, 혁명과 혁명가, 투쟁
이 글은 6월 28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기획 시리즈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열두 번째 시간이었다.
오늘 얘기는 1925~1927년 중국 노동자 혁명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 혁명은 시리즈 두 번째 강좌에서 다뤘습니다.
1927년 혁명 패배 후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광둥·추수 봉기 등 초좌파적 노선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봉기는 처참하게 실패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노동계급 기반을 다 잃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잔존 세력은 도시의 노동계급 기반을 복구하려 하지는 않고 산간 벽지로 도망쳤습니다.
이후 마오쩌둥하에서 공산당은 농촌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민족주의 정당으로 변했습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도시에서 노동계급 속에 뿌리내리려 애썼습니다. 1930년대 초반 한때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규모가 러시아 다음으로 컸습니다.
그들은 전쟁과 탄압 등 혹독한 시험을 무수히 치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악전고투하고 고군분투했습니다.
오늘 저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추구했던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을 돌아보며,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려 합니다.
중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탄생
중국에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1925~1927년 혁명 패배의 여파 속에서 형성됐습니다.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은 스탈린이 지도한 당시 코민테른에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중국 혁명이 자본주의적 혁명이고 국민당이 이 혁명을 지도할 것이라며, 공산당을 국민당에 예속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전략은 1927년 4월 장제스의 쿠데타와 7월 국민당 좌파 왕징웨이의 배신으로 파탄났습니다.
그러자 스탈린은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자 천두슈에게 패배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습니다.
한편 트로츠키는 식민지나 반식민지의 자본가들은 제국주의 억압과 지주제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늦게 등장해 너무 취약하고 또 아래로부터 부상하는 노동계급 투쟁에 두려움을 느껴, 자본주의적 혁명도 지도하지 못하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제국주의를 쫓아내고 지주제도를 폐지하는 과업은 노동계급의 혁명으로 성취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는 트로츠키의 이런 연속혁명론이 비극적으로 입증된 일이었습니다.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내에서 중국 혁명의 패배를 두고 스탈린주의 관료들과 트로츠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주장은 패배의 원인을 숙고하던 일부 중국 공산당원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특히, 소련에서 공부하던 많은 중국 유학생들이 트로츠키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그 집단의 주요 리더였던 왕판시[그의 책 《회상 — 나의 중국혁명》은 국내에도 번역돼 있다]는 1928년 겨울 모스크바 거주 중국인 학생들 사이에서 트로츠키주의자가 급속히 늘었다고 회고합니다. 특히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는 전체 학생 400명 중 100~150명이 트로츠키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스탈린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한 때에 이는 대단한 규모였습니다.
소련 유학생 트로츠키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스탈린 국가의 감옥에 갇히거나 살해당해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사히 중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고 정기간행물을 발간했습니다. 그 잡지 이름은 ‘우리의 말’(我們的話)이었는데, 그 정간물 지지자들은 젊지만 노동운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중에는 중국공산당의 간부도 있었습니다.
중국 국내에서 천두슈와 그의 지지자들도 트로츠키주의자가 됐습니다. 1927년 패배 직후 중국공산당 총서기직에서 사임한 천두슈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뒤늦게 접하고 크게 깨닫게 됩니다. 이후 그는 트로츠키를 지지한다고 밝혔다가 공산당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때 그가 쓴 ‘우리의 정치적 의견’이라는 문서는 중국 트로츠키주의 선언문 같은 지위의 글이 됐습니다. 천두슈 그룹은 ‘무산자’(無産者)라고 불렸습니다.
이 밖에도 중국에서 트로츠키주의 소그룹이 두 개 더 형성됩니다.
하지만 네 개의 트로츠키주의 그룹을 통합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젊은 활동가들이 1927년 패배 때까지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랐던 천두슈를 한동안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트로츠키의 강력한 촉구로 네 그룹은 1931년 5월 통합해 중국공산당 좌익반대파로 출범했습니다. 그때 조직원 규모가 무려 483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에 반대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지키고 노동계급의 혁명에 헌신하고자 했습니다.
시련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사는 것은 정말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국민당 치하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공개적 정치 활동은 불가능했습니다. 국민당 특무기관에 끌려가면 종종 재판도 없이 처형됐습니다. 더구나 중국공산당도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온갖 중상모략과 폭행을 가했습니다. 물론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많았습니다.
1931년 조직 출범 후 채 몇 달 지나지 않아 지도부 전체가 국민당 보안경찰에 잡혀가는 등 혹심하고 지속적인 탄압이 중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크게 위축시켰습니다. 그럼에도 상하이, 홍콩, 광저우, 중산, 원저우 등지에서 조직을 확장하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그때,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항일 민족주의 정서가 강력해집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민족주의 정서는 더욱 강화돼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1937년 트로츠키는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임무는 일본에 맞선 지금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강령과 독립적 활동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유격전에 뛰어든 일부 개인들을 제외하면 중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항일 무장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습니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모두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함께 싸울 생각이 전혀 없고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주로 상하이에서 노동자를 조직하려 했지만 일본군 점령하에서 혹심한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영향력 확대에 큰 장애가 됐습니다.
중일전쟁에 이어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서 전쟁에 대한 태도를 두고 견해가 엇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중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이라는 성격이 분명했지만, 제2차세계대전은 제국주의간 전쟁이라는 점이 당시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천두슈는 중일전쟁과 세계대전 모두 일본 군국주의와 독일 파시즘에 맞서는 전쟁이라며 서방을 지지했습니다. 독일 파시즘과 소련 스탈린주의 모두에 비판적이었던 게 지나쳐 서방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그의 주장은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중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분열해 버렸습니다.
왕판시와 정차오린 등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모두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간 전쟁이기 때문에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펑수즈 등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은 반(半)식민지인 중국에서 진보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중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면서 정치적으로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펑수즈 등의 다수파와 왕판시·정차오린 등의 소수파로 조직이 분열해 버렸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승리와 신중국 탄생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중국에서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이끌 사상적·조직적 준비는 돼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여전히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열돼 있었고, 둘을 다 합쳐도 1931년 통합 때의 절반 규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조직 분열 외에도 사상의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바로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고 신중국을 세운 일을 둘러싸고 그랬습니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중국 대륙에서는 바로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농민에 기반을 둔 중국공산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낮은 데다 설사 승리해도 도시에서 자본가 및 노동자 모두와 대결해야 하는 더 큰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고 봤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트로츠키는 식민지나 반식민지에서 제국주의를 축출하고 지주제도를 폐지하는 과제는 노동계급 권력만이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런 예측에 따라 노동계급과 괴리된 중국공산당이 권력을 잡을 수 없다고 내다봤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중국공산당이 승리해 국민당과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지주제도를 폐지했습니다.
그러나 1949년 중국 혁명은 민족해방 혁명이었지,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습니다. 연속혁명을 실현할 주체인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이 부재한 가운데,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농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아 당대 중국 사회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며 국가자본주의 건설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트로츠키의 예측을 믿었던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949년 혁명을 어떻게 이해할지를 두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중국에서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간계급인 지식인과 농민에 기반을 둔 사회세력이 역사적 숙제를 해결했다고 한다면, 이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과 맞지 않게 됩니다. 여전히 그 이론이 옳다고 주장하려면 신중국이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해야 했습니다.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다수파인 혁명적공산당은 실제로 그렇게 현실을 이론에 꿰어 맞춰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소수파인 국제주의공산당도 혼란스럽기는 비슷했습니다. 소수파의 지도자 왕판시도 다수파처럼 트로츠키주의의 정설에 현실을 꿰어 맞추는 것으로 나아갔습니다.
한편 소수파의 다른 지도자 정차오린은 중국공산당이 국가자본 계급을 대표하고, 1949년에 수립된 신중국은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했습니다. 혁명적공산당 지도자 펑수즈나 소수파 지도자 왕판시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정차오린은 1952년에 체포돼 노동교화소에서 27년을 징역살이 했기 때문에 이 견해를 더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1952년 탄압과 그 이후
비록 이데올로기적 혼란은 있었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토지 개혁이나 기아 반대 행진 등 중요한 쟁점에 개입하면서 성장을 했습니다. 노동계급 내에서의 영향력도 점차 증가했습니다.
1952년 중국공산당이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불법화하고 그 구성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강력한 국민국가를 통해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해야 했는데, 노동계급에 뿌리내리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그 걸림돌로 여겼습니다.
중국공산당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500여 명이 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구속됐습니다. 그중 일부는 노동교화소로 보내졌고, 다른 일부는 사기가 저하돼 운동을 포기했습니다. 이로써 중국에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사실상 소멸됐습니다. 일부 활동가들이 홍콩으로 가서 조직을 유지했지만, 그 규모는 크게 줄었습니다.
이후 68운동의 영향으로 홍콩에서 청년들이 급진화되자, 우중셴(吳仲賢)을 중심으로 일부 급진적 청년들이 《70년대》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트로츠키주의를 받아들이며 홍콩에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내부 갈등으로 혁명공산당과 혁명마르크스주의자동맹으로 분열했다가 1990년대 이후로는 모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홍콩에서 활동했던 트로츠키주의자 중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작고한 샹칭(向靑)입니다. 그는 1952년 탄압 전에 트로츠키주의 다수파의 핵심 인물이었고 홍콩에서는 혁명마르크스주의자동맹에서 활동했습니다.
그가 지난해 사망하기 직전까지 대륙의 젊은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교류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최근 노동운동이 급성장하는 중국은 트로츠키주의가 다시금 지지자들을 얻을 좋은 토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제 발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왜 처음에 커다란 세력이었던 1930년대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혁명 운동을 이끌기는커녕 실질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을까요?
첫째, 혹독한 탄압 때문이었습니다.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엄혹한 조건에서도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사상을 견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국민당, 일본 제국주의, 더구나 중국공산당의 가혹한 탄압으로 그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52년 중국공산당의 대대적인 탄압은 결정적이었습니다.
둘째, 결정적 시기에 나타난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습니다. 소련 사회의 성격과 1949년 신중국의 성격에 대한 정치적 혼란 때문에 트로츠키주의 진영 내에서는 분열과 사기저하 그리고 마오쩌둥 세력에 투항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가자본주의론이 왜 혁명적 실천의 등대가 되는지를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약점이 잘 보여 줬습니다.
또한 연속혁명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전략이므로 그것을 계획으로 채택하지 않는다면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들은 배웠어야 합니다.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적 노동자 혁명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적 중간계급 혁명이었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의 특무기관과 일본 제국주의의 감옥 그리고 마오쩌둥의 노동교화소에서 살해당하거나 고초를 겪으면서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키려 했던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경의를 나타내며 오늘 발제를 마치겠습니다.
시청자 발언
시청자 발언1: 1925~1927년 중국 혁명과 트로츠키
20세기 전반기의 많은 제3세계 나라들처럼, 1920년대 중국은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와 노동자 혁명의 가능성이 겹쳐서 나타난 사회였습니다.
흔히 교과서에서는 자본가계급이 피억압 민중을 이끌고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 부르주아 혁명 모델은 영국·프랑스·미국 등에서만 이뤄진 일로 오히려 예외적이었습니다.
이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나 식민지의 부르주아지가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피억압 민중의 자주적 행동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1920년대 중국 혁명에서 국민당이 노동자·농민의 대중운동을 탄압하고 억제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 결과 혁명이 약화돼 그들 자신도 한동안 중국의 한 귀퉁이만 지배하는, 여느 군벌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됐는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이 가망 없는 전망에 철저히 매달리도록 강요했는데요. 처음에는 중국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일 것이기에 부르주아지가 주도해야 한다는 잘못된 혁명 전략 때문에, 나중에는 국민당과의 동맹이 소련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습니다.
이와 다른 길을 제시한 사람이 트로츠키였습니다. 그는 저발전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소심해서 피억압 민중을 이끌 수 없으니 노동계급이 농민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켜 제국주의의 지배와 봉건제의 유산을 없애고 이어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려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소련 공산당의 여러 회의에서 처음부터 국공합작에 반대했고 1925년에 혁명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중국공산당이 당장 국민당과 결별하고 노동자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왕판시가 남긴 회고를 보면, 1920년대의 혁명이 패배한 후 일부 중국공산당원들이 트로츠키의 글들을 읽으면서 비로소 자신들의 쓰라린 경험을 이해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트로츠키가 옳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젊은 당원들이, 나중에는 주요 지도자 상당수가 트로츠키주의자가 됐습니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역사유물론은 기계론적이거나 경제결정론적이거나 숙명론적이지 않으며,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라고 이해합니다. 트로츠키의 이런 방법론을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 민주주의 문제에 잘 적용해야 합니다.
시청자 발언 2: 왕판시의 《회상》을 읽고
발제자께서 말씀하신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 중 한 명인 왕판시의 회고록 《회상》을 읽고 느낀 점을 공유하려 합니다.
이 책에서 왕판시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공산당에 입당한 과정, 1920년대 후반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서 트로츠키주의자가 된 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트로츠키주의자로 활동하면서 겪은 일을 회고합니다.
특히 중국에서 활동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진정한 혁명과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발제자가 말했듯이 여러 이유로 서로 분화하고 대립하는 등 어려움과 1949년 이후 중국을 서방보다 진보적인 국가로 분석하는 등의 한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탈린주의자들과 중국공산당에 맞서 중국 내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잘못된 지도로 혁명이 패배한 곳에서, 이에 맞서 진정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키려고 애쓴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등장 자체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가장 매서운 비판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국민당, 일본 제국 등의 박해를 뚫고 조직을 유지한 것 자체가 의미 있고, 진정한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본주의 체제가 끔찍해서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그렇게 마음먹은 지 얼마 안 돼 바로 왕판시의 《회상》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그에 따른 실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일어나고 청년들의 불만도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과거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걸어 온 길은 이들의 저항이 성공하는 데서 분명 교훈이 될 거라고 봅니다.
제국주의를 명료하게 이해하고, 자신들이 상대하는 지배자들이 국가자본주의 통치자라는 점 등을 안다면, 과거 혁명가들의 정신을 잘 계승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저항 물결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저 또한 이번 발제를 들으면서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처럼 더 열심히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청자 발언3: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점들
1930년대와 1940년대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논쟁을 혼자 읽었을 때, 정말이지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발제가 참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는 중요한 이견과 쟁점이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전쟁과 계급투쟁의 관계입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펑수즈는 ‘국민당 정부 퇴진’ 요구를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단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반면 왕판시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계급투쟁 방식으로 치러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봅니다. 트로츠키주의지만 다 같지는 않구나 싶었습니다.
둘째는 연사께서도 언급한 중일전쟁의 성격입니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왕판시는 중일전쟁을 마치 미국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의 대리전처럼 규정했는데, 저는 이것은 틀린 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챠오린은 더 나아가 미국이 참전하기 전부터도 중일전쟁에서 혁명적 패전주의를 주장했는데 이것은 트로츠키가 생전에 했던 주장과도 배치되는 잘못된 입장이었습니다.
정챠오린이 나중에 신중국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봤다는 것은 이번 발제를 듣고 처음 알게 됐고, 그래서 연사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정챠오린이 중일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치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당대의 만만찮은 쟁점을 놓고 이견이 있었기 때문에 조직적 협력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그런 위기가 닥치기 전에 서로 이견을 토론하고 실천을 통일하는 조직을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문도 있습니다. 저는 왕판시와 펑수즈가 국공내전 시기에 한동안 국민당 패배가 아닌 내전 중단, 국민당도 공산당도 아닌 제3지대를 주장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연사께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 내전에서 공산당을 지지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왕판시와 펑수즈가 예외적이었던 것인지, 이들의 입장이 바뀐 것인지 궁금합니다.
시청자 발언 4: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중요성
중국 혁명 이후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혼란과 대안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진정 존경할 만한 혁명가들이었습니다. 일본 헌병의 고문과 처형, 국민당의 백색테러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 가면서도 혁명의 대의를 지켰습니다. 가장 분노스럽게도 공산당은 이들을 반혁명 분자라며 공격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집권했을 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공격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계급 속에서 영향을 미치려면 노동계급과 함께 있어야 하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먼저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도시에 남아 혁명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1952년 12월 공산당은 반혁명 분자들을 잡는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합니다.
이런 억압들은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그들이 마주한 현실에 대한 혼란에서 비롯했습니다.
1920년대의 중국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일관되고 올바른 전략을 제시했지만,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은 스탈린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인이 이끄는 농민 군대가 혁명을 이뤘다는 사실은 혁명의 주된 세력이 노동계급이라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과 맞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중국의 트로츠키자들을 당혹케 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이 노동자 정당이라거나, 농민 정당이었지만 지도자들이 혁명적 정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안타깝게도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가 어떤 상황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소련이 건재할 뿐 아니라, 소련식 체제가 동유럽으로 확산되고, 중국에서도 공산당이 승리한 뒤 소련과 같은 체제가 수립되자, 스탈린주의도 반자본주의적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그에 따라, 스탈린주의 정당에 들어가 그 정당을 혁명적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또,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갈등을 빚자, 마오쩌둥이 스탈린주의를 청산하지 않을까 기대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극심한 탄압과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중국이 어떤 사회이고 스탈린주의 체제가 노동자 국가인가 하는 문제에서 혼란에 빠져 좌절한 것입니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게 해주는 이론이 바로 국가자본주의론입니다. 오늘날에도 사회주의를 쟁취하고자 한다면 국가자본주의론은 매우 중요한 실천적 함의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발제자의 정리
천두슈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한 분이 천두슈가 1920년대 중반 코민테른의 잘못된 지시를 무작정 따랐다는 비판을 어떻게 봐야 하냐고 질문해 주셨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두슈는 1925년 5월 30일 사건, 즉 노동자 운동이 거대하게 분출하고 중국 혁명이 시작됐을 때나 1926년 3월 20일 장제스가 쿠데타 예행 연습을 했던 중산함 사건 때에도 ‘공산당이 국민당에서 나와서 노동자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관계를 잘 봐야 합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모든 자금을 대 줬습니다. 무기도 지원했고, 보이틴스키, 로미나제, 보로딘과 같은 군사 기술자나 정치 지도자들을 파견했습니다.
이렇게 소련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모두 천두슈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뒤집고 국공합작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의 쿠테타가 있었는데 코민테른은 3월 말까지도 장제스를 코민테른의 명예회원으로 추켜세웠습니다. 천두슈의 주장은 완전히 묵살당했던 셈이죠.
1927년에 혁명이 완전히 패배하고 난 뒤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은 국민당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은 천두슈의 우경 기회주의를 탓했습니다. 천두슈는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왜 혁명이 패배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이를 반박하지 못하고 약 2년 동안 참고 지냈습니다. 천두슈의 친구는 그 모습을 보고 ‘상처받은 호랑이가 자기 상처를 쓰다듬으면서 동굴에서 웅크리고 있었다’고 표현하기도 했었죠.
그러다 중국 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평가를 보면서 눈이 번쩍 뜨였던 겁니다. 그래서 그가 트로츠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썼던 것이 1929년의 ‘우리들의 정치적 의견서’와 ‘중국공산당 전 당원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그 후 천두슈는 1932년에 국민당에 붙잡혀서 1937년까지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경험 때문에 스탈린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천두슈는 1939년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보고 “소련이 과연 노동자 국가인가? 오히려 스탈린이 완전히 통제하고 독재를 펼치는 나라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천두슈는 소련을 당시 나치 독일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국가로 보고 제2차세계대전 때 서방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나마 서방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약간 있다는 이유에서였죠. 물론 그 입장은 잘못된 것이지만 천두슈의 개인적 경험이 크게 영향을 줬다는 점을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트로츠키와 천두슈는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요, 트로츠키는 천두슈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1937년 천두슈가 감옥에서 나오자 트로츠키는 그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어 미국에서 활동하라고 설득합니다. 천두슈는 이를 물리치고 계속 중국에 있었습니다. 물론 감옥에서 나온 뒤로는 국민당의 감시 때문에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교류하지 않았죠. 어쨌든 천두슈는 1942년에 죽을 때까지 스스로가 트로츠키주의자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죽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2차세계대전 때 서방을 지지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래도 중국 혁명사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왕판시, 정차오린, 펑수즈의 입장에 대해서 질문한 분도 있었습니다.
정차오린은 만주가 중국의 식민지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그 전쟁을 만주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대결로 규정하고 혁명적 패전주의 입장을 폈죠.
한편, 원래 왕판시는 항일 투쟁을 벌여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1939~1940년에 태평양전쟁이 임박하자 항전 변질론, 즉 전쟁의 성격이 두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으로 변했다고 주장하며 혁명적 패전주의 입장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왕판시나 정차오린은 미국이 국민당의 배후에 있기 때문에 중일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싸움이라고 봤고, 그래서 패전주의를 주장하는 잘못된 입장을 취하게 됐던 것입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국민당도 아니고 공산당도 아닌 제3의 대안을 형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이 벌어지면서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항일 전쟁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왕판시의 주장도 다수파가 아니라 소수파였습니다. 이런 변화들이 있었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49년 중국 혁명 이후의 신중국에 대한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견해는 다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견해와 같았습니다. 즉, 중국공산당은 농민에 기반을 둔 정당이고 그들이 권력을 잡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격변들이 벌어지게 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장악한 마오쩌둥이 국유화를 하는 등 자신들이 사회주의라고 믿었던 정책들을 펴니까 그들은 내심 당황하면서도 그것이 노동자 국가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지를 보냈던 겁니다. 물론, 정치혁명을 통해 마오쩌둥 정권을 제거해야 한다고 봤지만, 중국 사회 자체는 사회주의라고 보며 잘못된 입장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마오쩌둥이 문화혁명 시기에 등장한 성무련을 트로츠키주의라고 비난한 것에 관해 질문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지배계급이 모든 활동가, 투사들을 주사파라고 공격하듯이, 마오쩌둥도 트로츠키주의를 일본의 돈을 받고 활동하는 스파이라는 식으로 비난했습니다. 다 근거 없는 비난이었죠.
그런 비난은 이미 1930년대에 시작됐습니다. 당시 소련에서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죠. 그것이 1960년대, 1970년대에도 이어져서 중국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자에게 무조건 트로츠키주의라는 딱지를 붙여서 공격했습니다.
조선인들 중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주세죽이나 박헌영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도 당시 중국인 유학생들과 같이 소련의 동방대학에 있었는데, 조선인 중에 트로츠키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까지 제가 살펴본 자료에서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입장이 뭐였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949년에 권력을 장악한 신중국의 성격이 무엇이냐는 문제에 골몰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신경 쓸 여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마오쩌둥은 상하이 등 먼저 권력을 장악하고 국민당을 내쫓기 시작한 지역에서부터 이미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엄청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1949년에도 탄압이 이어졌고요. 1952년 12월에는 전면적인 탄압이 있었던 것이지 그전에 탄압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중국 혁명의 성격을 고민하고 규명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한국전쟁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답변드리지 못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른 통로로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published From: https://wspaper.org/article/29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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